서양사학과 전공입니다
이 글은 저에 대해 궁금한 혹은 궁금해질 극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자기 소개글이자, 그래도 꽤 치열하게 살고 있는 제 인생을 위한 응원의 글입니다. 30년 남짓의 기간 동안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건과 생각에 대해 세 편에 걸쳐 적어보았습니다.
#2. 나만의 방향에 대하여
"서양사학을 전공했습니다."
A: "암기 잘 하나보네? 역덕이야?"
B: "카이사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C: "서울대긴 하지만, 성적이 조금 아쉬웠구나"
D: "되게 독특한 전공이네요. 어쩌다 관계없는 일을 하게 되셨는지?"
E: "그림 잘 그리세요?"(서양화과로 들으시는 분이 의아할 정도로 정말 많았다)
2년 전, 친한 선배랑 선문답을 한 적이 있었다. 그 형은 내가 한 여러 선택에 대해 '왜? 왜 그랬어? 왜 이거 말고 저거를 했어?' 끝없이 물어봤다. 계속 대답을 하다가 마지막에 더 이상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는 문장이 하나 튀어 나왔다.
"나는 통찰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이유는 없어. 그냥 그러고 싶어."
나는 언제나 통찰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당연히 그러지 못하겠지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거만한 생각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13살의 나는 우주를 이해하고 싶었으니.. 나름대로는 많이 양보한 결과다.
20살의 1년을 갈아 넣어서 학교와 전공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그리고 굉장히 간단한 사고 회로를 거쳐, 통찰력을 기르기 위해 20대에 인문학을 배워야겠다고 결심했다. 2013년 3월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학부에 정시로 입학했다.
21살의 1년은 재수 생활을 하며 얻은 강박을 치유하는 시간이자, 어렴풋하게 그리던 '통찰력'이라는 단어를 구체화하는 시간이라고 정의했다. 인문학의 범주에 들어있는 모든 맛을 천천히 거닐면서 느껴보기로 했다.
인문대학은 크게 문/사/철이라는 구분을 갖고 있다.
- 국문학, 영문학, 불어불문학, 언어학 등의 '문'
- 국사학, 서양사학, 고고학, 미술사학 등의 '사'
- 철학, 미학, 종교학 등의 '철'
문사철의 정말 다양한 영역의 수업을 들으며 책을 읽었고, 나에게 맞는 그리고 필요한 학문을 탐색했다. 그 때 사학계열 수업을 들으며, 적어도 나에게는, 굉장히 독특한 경험을 했다.
사학과의 교수님들은 으레 각자 생각의 결을 갖고 계시기 마련이다. 대부분은 정치 성향까지 맞닿아 있는 생각의 결은 논문을 찾아보면 대략적으로 감을 잡을 수 있다.
사학 수업은 글을 쓰는 것이 과제 혹은 시험인데, 일부 학생들은 높은 학점을 위해 본인의 글을 교수님의 생각의 결과 일치시키는 시도를 한다. 교수님의 방향에 맞추고 우수한 평가를 기대하는 이들은 대부분, 대차게 까인다.
'역사학자 A는 반대로 이런 주장을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사료가 B에 있는데 찾아보셨는지?'
낯설었다.
수험 생활로 돌아가 보자. 나는 재수를 하며 국사 교과서를 20회 이상 완독하고, 문장 단위/구 단위로 암기했다. 돌이켜 보니 감히 말하건데 쓰레기 같은 교육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는 사관이 정해져 있다. 아픔과 정치적 목표가 당연히 녹아있는 이유지만, 생각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 암기. 생각하는 방법을 닫아두고 사실관계만 달달 외우고 있었다. 심지어 사실인지 확인할 기회조차 없었다.
그동안 주입 받은 역사학과는 정반대로 역사학자들은 본인의 주장을 당당하게 내세우기 위해 수 십년 동안 사료를 찾고 생각을 정리한다. 그리고 왜 그러한 주장에 도달하게 되었는지 끊임없이 반문한다. 정반합, 정반합. 그렇게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정립해 나간다. 스스로의 통찰력을 쌓아 나간다.
그리고 역사학과는 이렇게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생각하는 방법을 배워야겠다. 그게 통찰력을 기르기 위한 최적의 길이다.'
22살이 되던 해에, 취업 잘되는 상경계열로 전과하거나 영문과를 가라는 주변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서양사학과를 전공으로 선택했다.
그 학기 학부생 중 서양사학과를 전공으로 택한 사람은 나, 한 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