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폼 전성 시대에 3시간 짜리 농구 경기가 떡상한 이유
테크 창업가들의 사랑방, NBA
빌 게이츠의 대학 동아리 친구, 마이크로소프트의 전 CEO, 그리고 현재 마이크로소프트의 개인 주주 중 지분이 가장 많은 스티브 발머(Steve Ballmer)는 2014년 LA 소재의 NBA 구단 LA 클리퍼스를 2Bn 달러에 인수하였습니다. 이는 직전 NBA 구단 최고 매각액이었던 0.55Bn 달러의 거의 4배에 달하는 금액으로 많은 사람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인수 이후, 2013-2014 시즌 146M 달러를 기록했던 LA 클리퍼스의 총 매출은 2021-2022 시즌 362M 달러 수준으로 크게 증가하였습니다. 영업이익 역시 12M 달러를 기록하며 흑자로 운영 중인 이 구단의 현재 가치는 3.9Bn 달러로 책정되니, 스티브 발머의 투자는 사람들의 우려와는 달리 꽤나 성공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스티브 발머와 마찬가지로 30명의 NBA 구단주 중에는 기업가 출신, 특히 실리콘밸리 발 인물들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스포츠 중계 사이트 '브로드캐스트닷컴'을 야후에 1.7Bn에 매각한 마크 큐반(Mark Cuban)은 댈러스 매버릭스를, 마이크로소프트의 공동창업자 폴 앨런(Paul Allen)은 포틀랜드 블레이져스를(cf.현재는 사망하여 여동생이 물려받음) 인수했습니다. 대형 벤처캐피탈 Kleiner Perkins의 파트너 조 레이콥(Joseph Lacob)은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최대주주이고, 알리바바의 공동창업자이자 부회장인 차이충신(Joseph Tsai)이 2019년 브루클린 넷츠를 인수하며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NBA에서는 이들처럼 기라성 같은 기업가들이 거대 기업을 경영하듯 구단을 운영하기 시작했고 이 구단들의 매출과 기업가치는 지속적으로 치솟아 아래와 같은 그래프를 그리게 되었습니다. 가장 저렴한(?) 구단인 뉴올리언스 펠리컨스가 1.6Bn 달러로 책정되었으니, NBA는 이제 30개의 유니콘 기업이 모여있는 연합체가 된 것이죠. (30개 구단 가치 full list)
NBA 구단의 가치가 이렇게 폭발적으로 성장한 기저에는, 물론 개별 구단과 구단주의 전략과 운영도 큰 영향을 미쳤지만, NBA라는 거대 연합체의 방향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NBA의 전략을 토대로 75살이 넘은 이 스포츠 프랜차이즈가 다른 스포츠 리그들과 달리 더욱 주목 받기 시작한 이유에 대해 알아봅니다. (개별 프랜차이즈 중 재밌는 사례는 추후 또 소개드리도록 하죠 :) )
스포츠 업계의 'Gen-Z Problem'
프로 스포츠 업계는 최근 치명적인 존재론적 위기를 겪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훨씬 더 다이나믹한 숏폼 영상, 어플리케이션, 게임, 그리고 소셜미디어로 무장한 Z세대들이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보던 2시간~3시간 짜리 경기를 보고 있기에는 너무나 지루하기 때문입니다.
한 리서치업체에 따르면 미국의 전체 인구 중 20% 이상을 차지하는 1996년 이후 출생한 Z 세대 중 53%가 스스로를 스포츠 팬으로 정의하였습니다. 1981년부터 1996년까지 출생한 밀레니얼 세대 중 69%가 그렇다고 응답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세대를 건너며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빠르게 식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동일한 서베이에 응답한 밀레니얼 세대 중 라이브 중계를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보는 사람은 무려 50%에 해당하는 반면, Z세대 중에는 그 절반이 안되는 24%만이 그렇다고 응답했습니다. 라이브 스포츠 중계를 아예 보지 않는다고 언급한 사람은 밀레니얼의 20% 였지만, Z세대의 39%에 육박했죠. 라이브 중계는 스포츠를 좋아하는 Z세대에게도 버거운 영역이 된 듯 합니다. (사실 정의상 Z세대는 아니지만 이미 유튜브와 릴스로 절여진 저 역시 2시간 이상의 경기를 계속 보고 있자면 좀이 쑤시곤 합니다.)
스포츠에 대한 Z세대의 관심도 하락은 거의 모든 영역에서 동일한데, 그 와중에 오히려 이전 세대에 비해 높은 관심을 받는 스포츠로는 E스포츠와 NBA 단 두 곳이 존재합니다. E스포츠는 애초에 Z세대가 본진인 영역이기에 당연하다고 볼 수 있지만, 1946년에 설립된 농구 리그가 다른 4대 스포츠 친구들(NFL(미식축구), MLB(야구), NHL(아이스하키))과는 전혀 다른 궤를 그리고 있는 것은 확실히 특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업의 재정의: Sports to Entertainment
NBA가 세대 간 점프에 성공한 기저에는 NBA 전체의 대표이사격이라 할 수 있는 아담 실버(Adam Silver) 총재가 있습니다. 아담 실버는 NBA가 다음 세대의 사랑을 받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돈 버는 리그'를 만드는 것 까지 성공시켰습니다.
아담 실버가 NBA를 운영하는 아이디어는 2018년 여름 pwc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읽어볼 수 있습니다. 그는 농구를 단순한 전통적인 스포츠로 국한하지 않고, 미디어, 엔터테인먼트 그리고 테크놀로지가 융합하는 지점에서 비즈니스가 꽃을 피울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1) NBA 선수는 운동선수가 아니라 '스타'다
아담 실버는 NBA 선수가 단순한 운동선수에만 그치는 것에 대해 경계합니다. 그는 선수들이 한 명의 '스타'로서 팬들과 밀접하게 소통하는 것에 대해 장려합니다. 이는 경기장 내에서 물리적인 거리를 가깝게 하고 팬서비스를 유도하는 것 뿐만 아니라 소셜 미디어 활동을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것까지 나아갑니다.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SNS는 인생의 낭비다'라고 말한 것과는 정반대의 흐름이네요.) 그는 선수들이 입는 옷과 듣는 음악을 적극적으로 공유하고, 그들과 유사한 나이대의 젊은 팬층과의 교류를 극대화하길 원합니다.
그는 단순한 취향 공유와 팬서비스를 넘어서서 선수들이 정치적인 목소리를 자유롭게 내는 것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지지합니다. 2016년 NFL 선수 콜린 캐퍼닉이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의미로 국가 연주 시 무릎을 꿇는 'Taking a Knee' 운동을 하고 나서 NFL 구단들 사이에서 사실상 퇴출 당한 것과는 정 반대로, 아담 실버는 NBA 선수들이 한 명 한 명의 보컬 리더로서 활동하며 지역사회의 정치적 메시지를 이끌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대표적으로 흑인 차별에 반대하기 위해 진행되었던 'Black Lives Matter' 운동이 번졌던 2020년, 경기장 바닥과 선수 유니폼 뒷면에 정치적 구호를 새기는 것을 허용하면서 흑인 사회에서의 영향력이 강한 NBA 선수들의 활동을 지지하였습니다. 또한 튀르키예 출신의 에네스 칸터(현재 미국으로 망명 후 에네스 프리덤으로 개명)가 에르도안 대통령을 지탄한 이후 국제체포영장이 발부되자 NBA는 에네스가 미국 시민에 준하는 자유로운 권리를 갖도록 보호하기도 했습니다.
NBA 선수들은 이러한 활동을 통해 관객들의 관찰을 받는 객체에서 팬덤을 주도하는 주체로 올라서게 됩니다. 어린 팬들은 입는 옷과 듣는 음악에서부터 NBA 선수들이 생각하는 방식까지 받아들이고 있고, 이들의 군집인 NBA 단체는 Z세대 커뮤니티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있습니다.
2) 소셜미디어를 어떻게 활용할지 모르겠다면 NBA를 보라
NBA는 선수들을 크리에이터로 만들 뿐만 아니라 팬들이 크리에이터가 되는 것 역시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유튜브에 NBA를 검색하면 수 많은 유튜버들이 NBA의 공식 중계 영상을 활용하여 하이라이트, 분석, 유머 영상 등을 제작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잉글랜드 프로축구 리그인 EPL을 검색하면 중계권을 소유하고 있는 구단과 방송사의 하이라이트 영상만 나오는 것과는 완전히 대비가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 실버는 이미 2018년부터 유튜브, 틱톡, 인스타그램 등에서 활동하는 영상 크리에이터들이 NBA의 공식 영상을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겠다는 기조를 밝혀왔습니다. 크리에이터들은 실제 경기 영상을 활용하여 마음껏 영상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고, 심지어 NBA는 이로부터 발생하는 광고 매출의 일부분을 크리에이터에게 분배합니다. 크리에이터는 이를 통해 더욱 많은 팔로워를 확보할 수 있고, NBA는 크리에이터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더욱 많은 잠재적인 농구 팬덤을 확보할 수 있는 선순환 구조가 형성되는 거죠. (이전 글에서 소개드린 나이키가 단기적 이익을 포기하면서 거대한 브랜드와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방식이 떠오르네요)
또한 NBA는 그 스스로 크리에이터이기도 합니다. 현재 기준으로 NBA의 인스타그램에는 무려 5.8만개의 게시물이 올라와있고, 유튜브에는 4.6만개의 영상이 올라와 있네요. NBA가 다른 스포츠에 비해 훨씬 큰 소셜미디어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은 주요 플랫폼별 팔로워를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NBA는 Z세대를 잡기 위해 그들이 머무르는 곳에 가장 효과적으로 다가서고 있습니다.
3) 메인 디쉬가 무엇인지 잊지 말 것!
제가 NBA를 흥미롭게 보는 이유는 이들이 단순히 세련된 전략을 펼치고 어린 팬들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아담 실버는 궁극적으로는 라이브 중계와 현장 경기가 가장 중요한 것임을 명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프로 스포츠 리그는 결국 돈을 벌어야 한다는 사실도요.
"우리의 전략은 '간식과 식사'로 칭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팬들에게 공짜로 간식을 준다면, 팬들은 점차 식사도 원하게 될 겁니다. 그 식사가 바로 NBA 농구 경기죠. 라이브 경기 경험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NBA는 앞선 모든 활동들이 결국 생중계 되는 경기를 즐기는 것으로 귀결되기를 원합니다. NBA의 매출 중 90%는 여전히 중계권료와 스폰서쉽 등에서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뉴미디어가 성장했을지언정, 여전히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라이브 경기 송출 권한을 파는 중계권료입니다. NBA는 2016-17시즌 ESPN, TNT와 9년짜리 중계권 계약을 체결하였는데, 이를 통해 한화 약 3조 2천억원의 수익을 매년 발생시키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직 연간 3조 7천억원의 NFL을 넘어서지는 못했지만 2조 9천억원의 EPL을 넘어서며 엄청난 규모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2025년 중계권 계약 종료를 앞두고 이미 디즈니와 같은 대형 미디어 사업자가 경쟁을 위해 줄을 서 있는 상황이니 아마 이 규모는 추후 증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또한 NBA에 대해 늘어난 관심을 바탕으로 아담 실버의 취임 이후 전체 스폰서쉽 매출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2014년 679M 달러 수준이었던 스폰서쉽 매출은 현재 무려 135% 증가하여 1.6B 달러를 기록하고 있는데, 나이키와 맺은 유니폼 메인 스폰서쉽과 유니폼에 붙는 패치에서 주로 발생합니다. 국내에서는 CJ의 비비고가 LA 레이커스와 5년간 100M 달러에 달하는 계약을 맺으며 르브론 제임스의 가슴팍에 만두 로고를 새기며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NBA 어플리케이션을 통한 모바일 생중계 멤버쉽인 NBA League Pass 를 런칭하는 등 D2C 형태의 비즈니스 역시 메인 디쉬 영역에서 지속적으로 실험하고 있지만 이 역시 ESPN 그리고 TNT와 함께 개발하며 결국에 가장 큰 돈을 벌어다주는 캐쉬카우가 무엇인지는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NBA 리그의 전체 매출은 아담 실버가 취임하던 2014년 4.8Bn 달러 수준에서, 코로나 시기 부침이 있었지만 2022년 10Bn 달러까지 성장하며 역대 최고 매출 기록을 갱신하였습니다.
아담 실버는 NBA를 오래된 역사를 가진 스포츠 중 하나인 농구에서 더 나아가, 지역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젊은 세대에게 귀감이 되는 선수 겸 셀럽들과, 주체적인 위치에서 커뮤니티 빌딩에 참여하는 팬덤이 결합된 총체적인 연합체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곧 리그 전체와 개별 구단의 경제적인 부가가치를 폭발적으로 상승시키는 것에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NBA를 단순한 스포츠가 아닌 '쇼 미디어 엔터테인먼트'라고 재정의한 것이죠.
NBA는 비록 기업체는 아니지만 Fast company가 선정한 '세상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 3위에 랭크될 정도로 뛰어난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된 단체입니다. AR, VR, NFT 등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 누구보다 빠르게 다가서되 본질은 명확히 직시하는 이 단체가 그려나갈 프로 스포츠의 미래가 점점 더 궁금해집니다. 한 달 전 NBA가 제시한 다소 황당하면서도 흥미로운 '스트리밍의 미래' 영상과 함께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
(그리고 LA 클리퍼스 화이팅..)